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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차, 투스카니를 돌아보다 국산 스포츠카의 혈통을 잇는다는 것
- 등록일2018-09-04 19:54:59.807
- 조회수1581
- 분류HMG 소식
얼마 전 포털의 뉴스 섹션이 훈훈한 소식으로 뒤덮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의식을 잃은 운전자의 차가 중앙 분리대를 부딪치며 나아가는 모습을 본 다른 운전자가 자신의 투스카니 차량으로 사고 차량을 가로막아 정지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문 선행이었지요. ‘투스카니 의인’이라 불린 운전자는 어떤 칭찬을 받아도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저널리스트인 저에게는 운전자의 선행만큼이나 투스카니라는 차량도 눈에 띄더군요. 개인적으로 투스카니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1년 가을의 어느 날입니다. 저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 스피드웨이를 찾았습니다. 현대자동차가 내놓은 투스카니(GK)의 시승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투스카니는 당시까지의 국산차로는 정통 스포츠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모델이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만난 투스카니는 기대 이상으로 야무진 차였습니다. 작심하고 밟아도 탄탄한 하체와 기름진 파워트레인이 좀처럼 한계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최상급 엘리사 모델에 얹힌 V6 2.7L 엔진은 3단 기어를 넣을 때까지 휠 스핀이 계속 일어날 정도로 충분한 파워를 냈습니다. 저는 당시 기아자동차가 로터스에서 들여온 엘란을 타고 있었는데 투스카니의 걸출한 동력성능에 감탄사를 연신 터트렸습니다. 투스카니는 분명 스포츠카에 가까운 동력성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투스카니가 정통 스포츠카의 특성을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칭찬할 만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원래 스포츠카는 자사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브랜드 파워를 키우는데 이상적인 최적의 홍보모델입니다. 판매량이 많지 않아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일류 제조사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스포츠카를 내놓는 이유입니다.
현대차는 투스카니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스포츠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투스카니에 앞서 1990년에 나온 스쿠프, 1996년의 티뷰론이 넓은 의미로는 스포츠카 영역에 포함되는 자동차들입니다.
먼저 스쿠프를 떠올려 볼까요? 스쿠프는 우리 고유의 국산차 가운데 두번째 쿠페입니다(최초의 쿠페는 세단, 왜건, 픽업 모델과 함께 선보였던 포니 쿠페임). 스타일링에 포커스를 맞춘 ‘스포츠 루킹카’를 지양한 스쿠프는 최초의 독자 개발 국산 엔진(알파)을 얹고, 최초로 터보차저를 적용하는 등 기술적으로 뭔가 다른 차였습니다.
티뷰론은 더 그렇습니다. 디자인부터 남다른 차였습니다. 콘셉트카 HCD(Hyundai California Design) 시리즈를 선보이며 잘 다듬어낸 독특한 근육질의 보디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호평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또 DOHC 방식 16밸브의 2.0L 베타 엔진과 포르쉐가 튜닝한 서스펜션, 삭스가 만든 댐퍼, 짧은 기어비의 변속기(TGX 모델), 속도등급 V의 고성능(UHP) 타이어 등 국내에서 처음 시도한 갖가지 사양들이 마니아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기존 스쿠프와 달리 티뷰론은 가성비 좋은 스포티한 차를 일컫는 스페셜리티카로 분류됐습니다. 스쿠프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겁니다.
그렇다면 투스카니는 어떨까요? 앞바퀴굴림 방식 준중형 아반떼 XD의 플랫폼을 활용한 투스카니는 동력성능이 기존 모델보다 대폭 강화됐습니다. 4기통의 스쿠프(1.5L), 티뷰론(1.8L, 2.0L)과 달리 6기통 엔진을 윗급 모델 엘리사에 처음 투입했습니다. 바로 V6 2.7L 델타 엔진인데 최고출력은 175마력을 냈습니다. 중형차 EF 쏘나타는 물론 준대형 그랜저 XG에도 140마력대의 2.0L 엔진(I4, V6)이 주력으로 얹히던 시절인데 개발진은 준중형 크기의 투스카니에 대형 엔진을 이례적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네바퀴굴림 구동계나 전자제어식 주행안정장치(VDC)의 도움을 받지 않는 순수 앞바퀴굴림 고성능 차의 한계 출력이 200마력 정도로 여겨지던 당시 기준으로 투스카니는 엔지니어링적으로 절정에 오른 차였습니다. 국산차로는 처음 적용된 6단 수동변속기, 삭스제 댐퍼와 스프링이 빚어낸 탄탄한 하체, 레드 컬러로 치장한 브레이크 캘리퍼 등 스포츠카 혈통임을 내세우는 요소들이 그득했습니다.
사실 투스카니가 데뷔하기 1년 전쯤, 저는 위장막을 쓰고 한창 테스트중인 시험차를 포착, 특종기사로 다룬 적 있습니다. 또 비슷한 시기에 개발진이 시험차를 토요타 7세대 셀리카와 비교하는 모습을 비공식 경로로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현대차 관계자들이 새 차에 들인 엄청난 노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뒷날 생각해보면 투스카니는 현대차가 정통 스포츠카를 내놓기 위한 마지막 스터디 과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체급(스페셜리티카)을 넘어서는 (정통 스포츠카에나 어울릴 법한) 과감한 시도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투스카니에는 동급 모델에서는 드물게 본격적인 그라운드 이펙트 성능을 고려한 차체 바닥 설계가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엘리사 수동변속기 모델은 다른 모델보다 차체가 3cm 낮고 언더커버가 씌워져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노면과 차체 바닥 사이를 지나는 공기의 흐름을 매끄럽게 만들어 차를 땅에 밀착시키는 효과를 구현했습니다. 기존 스포일러나 윙으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새로운 시도입니다.
국산차로는 처음으로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타이어를 출고 사양으로 준비한 점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해당 타이어가 글로벌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자랑하는 고성능 프리미엄 타이어였기 때문입니다. 고성능 스포츠카나 슈퍼카에 어울리는 명기를 신긴다는 건 그만큼 투스카니의 퍼포먼스가 걸출하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구동계가 앞바퀴굴림이라 그렇지 만약 투스카니가 뒷바퀴굴림 혹은 네바퀴굴림이었다면 스포츠카로 불렸을 겁니다. 피가 끓어 오르는 젊은 카마니아 입장에서 카탈로그만 봐도 흥분하게 되는 그런 차였습니다. 저도 엘란을 팔고 투스카니를 사려고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짝이 네개 달린 차를 사라’는 부모님의 엄명 때문에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대신 절친이 블랙 컬러의 투스카니를 뽑았을 때 마치 제 자신이 차를 바꾼 것처럼 기뻐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친구의 차는 2.0L 베타 엔진의 GTS인데 가변밸브 장치인 VVT(Variable Valve Timing) 시스템이 새로 더해진 모델이었습니다. 이 역시 아반떼 XD 2.0과 더불어 국산차 최초 적용 장비입니다.
최근 국내에 데뷔한 벨로스터 N은 어떨까요? 이미 해외 핫해치 시장에서 강자로 급부상한 i30 N에 이어 선보인 벨로스터 N은 그냥 ‘잘 달리는 차’가 아니라 ‘펀’한 고성능 자동차로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모두 현대차의 고성능 브랜드 N만의 ‘맛’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치상의 성능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유의 개성과 매력으로 감성까지 자극하는 N이 성공적인 스토리를 앞으로 써내려 갈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투스카니라는 도전의 역사가 없었다면 N의 성공적인 포지셔닝은 꽤 늦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2001년 처음 투스카니를 만났을 때, 심장이 팔딱팔딱 뛰던 흥분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개발진들이 제2, 제3의 투스카니를 개발하고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글. 박영웅(자동차 저널리스트)
출처. HMG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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